미투 폭로 40명중 1명만 복직…생활고에 또 운다

동아일보
에디터 동아일보|
JTBC '밥 잘 사주는 누나'에서 사내 미투 총대를 멘 윤진아(손예진) / JTBC 홈페이지 캡처
《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용기를 내면 끝날 줄 알았다.’ 성폭력 피해를 본 여성들이 고심 끝에 ‘미투(#MeToo·나도 당했다)’를 선택한 이유다. 시간이 걸려도 언젠가 끝이 보일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19일 ‘전국 미투 생존자 연대’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 40명 가운데 원래 직장에 돌아간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일자리를 잃은 채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며 끝없는 법정 투쟁에 매달리고 있었다. 미투 이후에도 피해자들은 여전히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 
이은서(가명·28·여) 씨에게 직장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진 직장 상사의 성희롱 탓이다. 그는 업무를 가르쳐준다며 다가와 이 씨의 팔과 어깨 등을 만졌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어느 날에는 “단둘이 출장 가자”고 제안했다. 견디다 못한 이 씨는 올 4월 사내 고충처리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했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이슈가 한창일 때다. 이 씨는 자신의 문제도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기대가 깨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미투 이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회사는 인사 발령을 냈다. 대상은 가해자가 아니라 이 씨였다. 하던 일과 관련 없는 엉뚱한 부서였다. ‘회사를 나가라’는 뜻이었다. 이달 초 이 씨는 회사에 병가를 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저축한 돈이 많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가해자 고소를 위해 알아본 변호사 선임비용만 1000만 원이 넘었다. 재취업을 하고 싶어도 자신의 미투가 걸림돌이 될까 봐 무섭다.

올 3월 ‘전국 미투 생존자 연대’가 발족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를 돕기 위해 결성된 모임이다. 현재 참여 중인 피해자는 약 40명. 평범한 회사원과 공공기관 직원, 프리랜서나 계약직 근로자 등 다양하다. 그러나 미투 이후 다니던 직장으로 돌아가거나 같은 일을 다시 맡은 사람은 6월 19일까지 한 명에 그쳤다. 나머지는 폭로 후 다니던 직장에서 휴직하거나 사실상 반강제로 퇴직했다.

한 지방자치단체 산하 공공기관에서 일하던 30대 여성 A 씨는 1년 넘게 복직하지 못했다. 그는 상사의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지난해 휴직했다. 2015년 5월 상사의 성희롱을 내부에 알린 뒤 아무 조치가 없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인권위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 조치를 권고했다. 해당 기관은 A 씨를 독방에 혼자 근무하게 했다. A 씨에게는 ‘고문’처럼 느껴졌다. 다른 상사나 동료들의 시선도 따가웠다. 그렇게 2년 가까이 버티다가 결국 휴직을 선택했다.

계약직이나 프리랜서는 최소한의 선택권도 갖지 못한다. 한 공공기관에서 파견계약직으로 일하던 채희정(가명·35·여) 씨는 2014년 회식 자리에서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는 정규직이었다. 채 씨는 상사를 경찰에 고소했다. 고소 한 달 뒤 회사는 채 씨에게 ‘재계약 불가’를 통보했다. 2년 계약이 보통이지만 채 씨는 1년 만에 쫓겨났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피해자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심리치료비와 소송비까지 마련해야 한다. 보통 성범죄 피해자 한 명이 상담센터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 치료를 받는 비용은 회당 5만∼20만 원. 성폭력 가해자를 고소한 구은영(가명·33·여) 씨도 2년 넘게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고 있다. 2주에 한 번 다니는데 한 달에 약 10만 원이 든다. 그는 법원과 변호사 사무실을 오가느라 재취업도 못 했다.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와 치료비를 마련하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소송비용이다. 만약 가해자가 무고나 명예훼손 등으로 맞고소할 경우 변호인 선임비용은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필요하다.

○ 법과 제도 모두 그들을 외면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장치는 제법 갖춰져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이런 장치를 활용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고소 후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형사합의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합의금을 쉽게 요구하지 못한다. 가해자가 흔히 내세우는 ‘꽃뱀’ 주장 탓이다. 형사배상명령은 법원에 신청한다. 성폭력 피해자가 별도의 민사소송 없이 형사재판 선고와 함께 배상을 받게끔 하는 제도다. 그러나 실제 배상액은 매우 적다. 배상이 각하되는 경우가 흔하다. ‘온전한 피해 보상’과 거리가 멀다 보니 피해자도 외면하고 있다.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막대한 비용과 패소 부담 탓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성범죄 손해배상액은 보통 100만∼500만 원에서 결정된다. 피해자가 입은 실제 손해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다. 공무원 박모 씨(36·여)는 유죄가 확정된 성추행 가해자를 상대로 2016년 2200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1심에서 인정된 건 100만 원에 불과했다. 도리어 가해자 측 소송비용 300만 원가량을 물어줬다. ‘마이너스 200만 원’ 판결인 셈이다.

형사고소 후에는 법무부 산하 검찰청 피해자지원실을 통해 치료비나 긴급생계비 등을 지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기소가 확정돼야 지급이 가능하다. 피해 입증도 쉽지 않다. 검찰 관계자는 “사실 입증이 비교적 명확한 강간 피해자와 달리 추행 피해자들은 이런 지원 혜택을 받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은지 eunji@donga.com·최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