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수 생활 해보니 자영업자 존경스러워”

동아일보
에디터 동아일보||2018-06-13 15:00
명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국내 5대 그룹 계열사를 다닌 K는 40대 초반에 명예퇴직을 했다. 직장에서 크게 출세할 전망이 안 보이고 명예퇴직금 3억 원을 손에 쥘 수 있어서 한 선택이었다. K는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오래 일한 경력을 살려 조그만 사무실에 PC 1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막연히 생각했던 것만큼 녹록지 않았다. 실적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이, 빈 사무실만 꾸려가다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업을 접었다.

내 친구 K와 오랜만에 소주잔을 기울인 것은 2017년 이맘때쯤이다. K는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이렇게 말했다. “반(半)백수 생활을 몇 년 해 보니, 동네의 조그만 구멍가게 주인이건 노점상이건 스스로 벌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존경할 만한 대상인지 알겠더라.” K의 진지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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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말처럼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커피숍, 치킨집, 빵집이 즐비한 한국에서 자영업으로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통계를 보면 창업해서 5년을 버티는 곳은 10곳 중 3곳에 불과하다. 7곳은 5년 안에 문을 닫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의 대부분은 임차료와 원료비로 나간다. 장사가 안 돼도 거르는 법이 없는 세금 공과금 신용카드 수수료, 한 달이 멀다 하고 오르는 대출이자까지 내고 나면 살아남기만 해도 잘한 것이다. 장사가 조금이라도 된다 싶으면 이번에는 건물주가 나타나서 “임대료 올려줄래? 짐 싸서 나갈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정부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영업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정책을 줄줄이 쏟아내는 중이다. 일례로 금융권은 3월 말부터 대출 건전성 강화를 명분으로 자영업자 대출을 바짝 조이고 있다. 이것만으로 부족했던지 금융당국과 은행이 태스크포스를 꾸려 개인사업자 대출에 대한 점검을 강화하기 위한 검토 작업을 하고 있다. 말이 좋아서 ‘점검 강화’이지, 돈 떼일 위험이 높은 자영업자들에게는 대출을 덜 해주고 이자는 더 받으려는 준비운동이다. 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자영업자 부도 확률은 3배가 높아지는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에서, 학식 있는 관료들과 금융 엘리트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어떤가. 인건비 부담이 늘어난 것은 둘째 치고 자영업자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가슴을 후벼 판다.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는 청와대의 황당한 현실 인식은, 560만 자영업자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올 초부터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지만, 누구 하나 귀 기울이는 당국자가 없다.

왜 장하성 정책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의 귀에는 자영업자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 것일까. 내 친구 K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면면을 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순탄하게 명문 대학을 졸업했고,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된 교수직에, 가진 재산도 노후 걱정 하지 않을 만큼 넉넉한 사람들이잖아. 그들은 본인들이 경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경제란 게 책상머리에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러다가 평생 모은 퇴직금을 날리지 않을까’, ‘잘못해서 가족을 굶기지 않을까’, ‘은행에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으면 직원들에게 줄 월급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안 해본 사람들은 모르는 거야.”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