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피해 키우는 ‘순결 이데올로기’, 일제강점기 때 시작

동아일보
에디터 동아일보|
홍양희 한양대 연구교수 발표 논문
‘식민지 조선의 강간죄 구성과 수치심’ 
미투 열풍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 피해 여성은 2차 피해 등을 우려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이다. 지난달 8일 서울 광화문 부근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집회에 참가한 한 시민이 흰 장미와 손 팻말을 들고 있다. 동아일보DB 
“그건 좀 생각해 볼 문제일세. 징역을 살리면 분풀이는 될가 모르지마는 도리어 문제를 번페스럽기만 맨들 뿐일세. 말하자면 자네 매씨의 불행을 세상에 광고하는 거나 진배없단 말야 그러면….”

1934년 발표된 현진건의 소설 ‘적도’의 일부분이다. 자신의 누이가 옛 애인으로부터 강간을 당하자 고소를 준비하던 주인공에게 친구가 건넨 조언이다. 그러면서 그는 “가련한 일이거든 악착한 일이거든. 그러나 돼지발에 밟힌 진주니 돼지에게 던져주는 수밖에 더 있는가”라며 누이를 성폭행범과 결혼시키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1912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근대적 의미의 강간죄가 처음으로 도입됐지만 법정에서 피해 여성의 처녀막 상실 공방이 이어지는 등 2차 피해가 생겨났다. 사진은 현진건의 연재소설 ‘적도’.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동아일보의 1925년 8월 6일자 ‘진주애화 흥덕처녀의 死’라는 제목의 기사에선 이웃집 남성에게 강간을 당한 여성이 고소조차 못 한 채 아버지로부터 “사당년”이라는 책망을 당하자 결국 목숨을 잃은 사건이 보도됐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강간죄의 재판 과정이 순결을 잃은 여성을 매도하는 장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약 100년이 지난 후 지금의 대한민국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최근 미투 열풍이 우리나라를 뒤흔들고 있지만 여전히 수치심과 2차 피해가 두려워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피해자가 상당하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2차 피해’의 뿌리를 추적한 연구가 나왔다. 홍양희 한양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가 일제강점기 강간죄 구성 요건과 판례, 동아일보 기사 등을 연구해 발표한 ‘식민지 조선의 강간죄 구성과 수치심’ 논문이다.

강간이 근대적 의미의 형벌로 규정된 것은 1912년 3월 18일 공포된 ‘조선형사령’부터. 당시 형법 17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13세 이상의 부녀를 간음하는 자는 강간의 죄로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함”이라고 규정했다.

처녀막 상실이 강간의 주요 기준이 되면서 비과학적인 ‘처녀 감별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32년 3월 13일자 기사. 동아일보DB 
문제는 실제 재판 과정에서 여성 처녀막의 상실을 강간죄 여부를 가르는 핵심 기준으로 내세웠던 점이다. 일제강점기 강간범죄를 다룬 사건 중 기록이 남아있는 고등법원 판결문은 총 4건. 이 중 1912년 8월 21일 경성고법의 판결문에선 “처녀막의 열상을 범행으로 인하여 발생한 상해로 보고 강간죄를 적용한다”고 적혀있다. 이후 강간죄를 다룬 모든 판결문에서 처녀막이 훼손됐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공개적인 법정에서 처녀막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자 당시 갑상샘의 모양과 혈액 검사 등으로 처녀를 구분할 수 있다는 비과학적인 ‘처녀 감별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홍 연구교수는 “정조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양반가 일부 여성에게만 통용되던 것이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든 여성에게 강압적인 수단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식민지 지식인 중에선 이 같은 왜곡된 현실에 대한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이도 있었다. 조선인 법학자였던 당시 정광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1902∼1980)는 1936년 4월 2일 동아일보에 “정조만 빼앗기고 이유 없이 구축(驅逐)을 당할 때에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여성에게 현 국가는 얼마나 그를 옹호하는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정 교수의 지적은 2018년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