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상습성’ 인정되면 친고죄 폐지前 범행도 처벌

phoebe@donga.com2018-03-02 09:50:08
공유하기 닫기
판례로 본 미투 형사처벌 기준 
자료사진 출처 | ⓒGettyImagesBank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으로 많은 성추행 피해가 드러나고 있지만 가해자들을 처벌하는 것에는 상당한 장애물이 있는 게 현실이다. 사건들이 오래전에 일어나 공소시효(10년)가 지났거나, 친고죄가 폐지된 2013년 6월 이전 범행은 피해를 당하고 나서 1년 안에 고소를 하지 않은 사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습강제추행죄를 적용하면 2013년 6월 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1년 안에 고소를 하지 않았어도 가해자를 처벌할 길이 있다. 상습강제추행죄는 2010년 4월 15일 상습범을 가중처벌하기 위해 형법에 신설됐다.

○ 상습성 있으면 고소 없어도 처벌 가능

상습강제추행 혐의가 적용돼 형사 처벌을 받은 대표적인 사례는 강석진 전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57) 성추행 사건이다. 강 전 교수는 수년간 제자 등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2016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이 확정됐다. 강 전 교수는 2008년 초부터 2014년 7월까지 자신이 지도한 대학원생 등 9명을 11차례 강제추행한 혐의를 받았다. 피해 여성 8명은 고소 자체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검찰이 만약 이런 상황에서 강 전 교수에게 단순 강제추행 혐의를 두고 있었다면 피해 여성 9명이 당한 피해 전체를 수사하기가 어려웠을 수 있다. 이 중 다수는 2013년 6월 이전에 성추행 피해를 당했고 사건 후 1년 이내에 고소도 하지 않았다.

수사당국도 처음부터 상습강제추행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사건은 2014년 7월 강 전 교수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타 대학 출신 인턴 여학생의 고소가 발단이 됐다. 손영배 당시 대검찰청 형사2과장은 현직 서울대 교수의 성추행이라는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구속 수사하도록 지휘했다. 수사가 본격화하자 피해 신고가 잇따랐고, 그 결과 피해자가 9명까지 늘어 검찰이 상습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할 수 있었다.

법원은 유죄 판결을 내렸다. 특히 단순 강제추행이었다면 반드시 고소가 필요했던 2013년 6월 이전 범죄에 대해서도 유죄를 인정했다. 고소가 없었지만 상습강제추행으로 기소해 유죄를 받은 것이다. 법원은 강 전 교수가 2010년 7월부터 2014년 7월까지 피해자 7명에게 8차례 추행한 혐의에 대해 유죄로 판단했다.

또 서울중앙지법 민사208단독 유영일 판사는 지난달 21일 강 전 교수에 대해 “피해 학생 5명에게 2000만∼6700만 원씩 총 1억52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 취약 시기인 2010∼2013년 범행 처벌

지금 이어지고 있는 미투 폭로는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최근 열풍을 타고 나온 것들이어서 ‘사건 후 1년 내 고소’ 요건을 갖춘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상습강제추행죄를 활용한다면 2013년 6월 이전에 피해를 당하고 나서 1년 안에 고소를 하지 않았어도 2건 이상 반복적으로 성추행을 당한 것을 입증한다면 가해자가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66)과 배우 조민기 씨(53) 등은 여러 명에게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힌 정황이 많이 공개됐다. 2001년부터 2010년 사이에 대부분의 범행이 이뤄진 이 전 감독은 앞으로 2010년 4월 15일 이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사실이 추가 폭로되면 상습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 조 씨는 “2011년부터 수많은 성폭력 및 성희롱 피해자들을 지켜봤다”는 학생들의 피해 증언이 나온 터라 상습성을 의심받고 있다.

권오혁 기자 hyuk@donga.com 

카톡에서 소다 채널 추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