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대 잡는 히잡女…탈석유 나선 석유왕국… 금기 허물다

동아일보
에디터 동아일보||2018-01-09 09:52
사우디 33세 빈 살만 왕세자 파격 
사우디아라비아가 여성의 운전을 허용하기 전인 2014년 3월, 수도 리야드에서 한 여성이 운전대를 잡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올 6월부터 여성의 운전을 허용할 방침이다. 리야드=AP 뉴시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월 13일은 특별한 날이다. 이날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킹파크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알힐랄과 알이티하드의 프로축구 경기에 처음으로 특별한 손님이 초대되기 때문이다. 사우디 여성들은 이날부터 사우디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포츠인 프로축구를 경기장에 방문해 직접 즐길 수 있게 됐다. 사우디 왕실이 지난해 10월 여성의 스포츠 경기 관람을 허용하는 칙령을 내린 뒤 처음으로 정책이 시행된 것이다. 올해 사우디에서 이런 큰 변화가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 2018년은 사우디 변화의 원년


고령의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82)은 조만간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33·사진)에게 왕위를 계승할 예정이다. 1932년 건국 이래 현재 7대 국왕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지켜왔던 ‘형제 계승’이라는 왕위 계승의 법칙이 처음으로 ‘부자 세습’으로 바뀐다.

권력 이양의 규칙이 바뀌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민감한 시점에 사우디의 젊은 피 무함마드 왕세자는 기존의 정치·사회·경제를 파격적으로 뒤흔드는 개혁 정책을 들고 나왔다. 보수적인 수니파 왕정 국가의 큰형님 격인 사우디에서 그동안 금기시됐던 것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당장 1분기(1∼3월) 중 일반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관광비자가 발급된다. 매년 성지 메카를 순례하기 위해 1000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이 사우디를 찾고 있지만 정작 일반 관광객들은 까다로운 비자 발급 조건 때문에 애를 먹어 왔다. 그러나 지난해 8월 무함마드 왕세자가 2020년까지 홍해의 50개 섬을 개발해 대규모 관광특구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관광비자 도입이 가시화됐다. 심지어 비키니 수영복과 음주까지 허용하겠다고 선언했다.

3월부터는 상업 영화관이 문을 연다. 사우디에서는 1980년대 초반 이슬람 부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모든 영화관이 폐쇄됐다. 약 35년 만에 영화관이 다시 문을 여는 것이다. 그동안 매년 25만 명 이상의 사우디 국민이 영화를 보기 위해 아랍에미리트(UAE)나 바레인 등으로 출국해야 했다. 21세의 청년이 생애 최초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바레인까지 500km를 여행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을 정도.

사우디 여성들의 숙원이었던 운전도 허용된다. 사우디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 운전이 금지된 국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살만 국왕이 여성 운전을 전격적으로 허용하는 칙령을 내리면서 운전면허증을 소지한 30세 이상 여성은 올해 6월 24일부터 운전대를 잡고 도로를 질주할 수 있게 됐다. 2015년 12월 사우디 여성의 참정권이 허용되고 오랫동안 여성 인권을 억압해 오던 악습마저 폐지되면서 변화의 물결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 사우디 ‘비전 2030’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올해 시행될 일련의 정책들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2016년 4월 발표한 ‘사우디 비전 2030’ 계획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비전 2030은 △활기찬 사회 △번영하는 경제 △진취적인 국가 등 3대 영역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개혁 계획이다. 저유가 기조와 에너지신산업으로의 변화 속에서 석유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탈피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한 사우디의 고민을 담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비전 2030의 발표 배경을 대외적으로는 국제유가 하락에 대응하고 적성국인 이란의 부상을 견제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심각한 실업 문제를 해소하고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우디는 석유 부문이 2015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41.8%, 재정수입의 87.5%를 차지한다. 하지만 2014년 중반 이후 저유가 추세가 이어지면서 정부 재정적자가 심화하고 외환보유액이 급감했다. 이와 맞물려 핵합의 타결 이후 2016년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풀린 이란이 부상하면서 역내 정치·경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란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위협은 사우디 내부에 잠재된 불만이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2012년 27.4%였던 사우디 청년층(15∼24세) 실업률은 지난해 32.6%로 치솟았다. 사우디 인구의 3분의 2가 30세 이하라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실업 문제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정권 교체의 열망으로 이어진 것을 지켜본 사우디로서는 실업 문제 해결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다. 최근 이란도 실업 문제 등 정부의 경제 실정을 규탄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 사태로 홍역을 앓았다.

○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핵심

무함마드 왕세자는 비전 2030 계획을 통해 일자리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2015년 기준 11.6%인 전체 실업률을 2030년 7.0%로 낮출 것을 공약했다. 또한 현재 높은 실업률의 원인을 여성의 낮은 경제 참여율 때문으로 보고, 여성 노동참여율을 현 22%에서 30%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사우디 당국이 여성의 운전을 허용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사우디 여성의 학업과 경제활동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한 것이다. KOTRA에 따르면 2017년 6월 기준 사우디 여성 인구는 약 1000만 명으로 이 중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한 30∼54세 잠재 운전자는 319만 명. 사우디 당국은 이들 중 일부가 경제활동인구가 돼 일자리를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자동차 판매시장과 금융시장이 활성화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그동안 여성을 운송해왔던 외국인 운전자 채용이 줄면 월평균 1105달러에 달하는 개별 가구의 고용비용이 줄어 가처분소득이 늘어난다. 운전기사와 부양가족에게 제공되던 복지 혜택을 절감할 수 있게 돼 세수도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우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는 사회의 개혁·개방 분위기와 맞물려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란과의 체제 경쟁을 통해 중동 전반에서의 여성 인권 제고에도 기여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이란에서는 ‘사우디도 변하는데 우린 뭐 하고 있나’라는 불만이 나온다. 왕위 계승을 앞두고 사우디에서 시행되는 개혁 조치가 정치적 이벤트 성향이 강하긴 하지만 이란 등 인근 국가에 파급되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은 지난해 12월 히잡을 쓰지 않는 여성을 비롯해 이슬람 율법을 위반한 이들을 체포하지 않는 대신, 계도하기로 했다. 이는 최근 사우디가 여성 인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잇달아 발표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카이로=박민우 특파원 minwoo@donga.com 
지난해 2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음 열린 만화페스티벌 ‘코믹콘’의 마스코트. 전통 두건을 둘러쓴 남성이 서양 슈퍼히어로가 하듯 상의를 걷어 제치며 교차하는 칼로 구성된 사우디 상징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사우디 코믹콘 웹사이트 
● 올해 사우디에서 시행되는 정책

▽ 여성 운동경기 관람 허용. 1월 13일 프로축구 알힐랄과 알이티하드 경기부터 시행
▽ 1분기(1∼3월) 일반 관광비자 도입
▽ 3월 상업 영화관 영업 허가서 발급
▽ 6월 24일부터 여성 운전 허용
▽ 하반기(7∼12월) 국영석유업체, 아람코 기업공개(I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