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11세 되면 자퇴시키고 청소 가르쳐야”…집시사회 전통?

이예리 기자
에디터 이예리 기자|
동생 니키타(9)에게 설거지 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니콜. 사진=Mirror
영국 북부 웨일즈에 펼쳐진 황무지. 이곳에는 25대 남짓 되는 카라반(차에 매달아 끌고 다니는 이동식 주택)과 트레일러 주택들이 모여 있습니다. 주말 캠핑장 같은 광경이지만 사실 이들은 정착지 없이 떠도는 현대판 집시(Gypsy)들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여행자(Travellers)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여행자’ 무리의 장로 격인 패디 도허티(Paddy Doherty)씨는 스스로를 ‘집시들의 왕’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는 미러(Mirror)와의 인터뷰에서 자기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공개했는데, 여전히 많은 여행자 아이들이 ‘전통’이라는 명목 하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패디 씨의 손녀인 로잔(Roseanne·13)과 마가렛(Margaret·9)역시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안 살림을 배우고 있다고 합니다. 마가렛은 “전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청소하는 법을 배웠어요. 로잔 언니랑 엄마가 청소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로잔은 건조한 손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창 학교에서 공부하고 친구들과 놀 나이에 온종일 집안일만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폐쇄적인 집시(여행자)사회에서는 평판과 입소문이 곧 모든 것이며 특히 이 평판은 여성에게 더욱 엄격히 적용됩니다. 여성이 집안 관리를 거의 대부분 도맡아 하기에 많은 여행자 여성들이 하루종일 청소에 매달립니다.

친구 나예샤(Nayesha·오른쪽)과 함께 있는 로잔. 사진=Mirror
로잔은 “남의 트레일러에 들어갔는데 깨끗하지 않다 싶으면 마음이 아주 많이 불편하고 그 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요. 우리 사회에서 청결은 정말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로잔을 비롯한 집시 공동체 소녀들은 하루 최소 5시간을 청소하는 데 쓰고 있으며, 대걸레는 더럽다는 인식 때문에 바닥 청소는 모두 손으로 합니다.

하루 종일 걸레질하고 표백제와 세제를 만지느라 13살 로잔의 손은 건조하고 부르튼 상태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이 소녀들에게 지상과제나 다름없습니다.

할아버지 패디 씨는 이런 손녀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는 “여자 아이들은 정말 하루 종일 청소를 합니다. 남자 아이들에게도 깔끔함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여자 아이들에겐 그 기준이 훨씬 더 높죠. ‘깔끔하지 못한 여자’라는 소문이 나면 집시 사회에서는 끝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생활방식을 고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현대 여행자들은 조상들과는 달리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일정 지역에 이동주택을 세워 놓고 반쯤 정착하다시피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백 년 전처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일은 이제 거의 없지만 아직도 많은 여행자들이 전통적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굳게 지킵니다.

이들은 ‘남자든 여자든 생활공간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살림을 잘 하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 아이들에게 의무교육조차 시키지 않으려 합니다. 학교에 보낼 시간에 일하는 법을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남자아이들에게는 벽돌 쌓기나 나무 자르기를, 여자아이들에게는 청소와 요리, 육아를 가르칩니다.

행주를 들고 있는 마가렛. 사진=Mirror
패디 씨 같은 여행자들은 ‘전통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현대 사회 기준을 따를 필요도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글을 읽고 쓰는 법, 기초적 수학 지식, 상식 등이 없으면 바깥 사회에서 일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패디 씨 역시 손녀들이 학교에 다니기를 내심 바라고 있지만 다른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제 조카 중 한 명은 대학을 졸업하고 정신과 의사가 됐습니다. 저는 공동체 사람들에게 ‘봐라, 여행자 가족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도 학위를 딸 수 있다’고 누누이 말하지만 귀담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손녀들도 언젠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지만…”

로잔과 마가렛의 장래희망은 헤어디자이너입니다. 그러나 로잔은 “만약 훗날 제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면 제가 배웠던 것과 똑같이 청소하는 법을 가르칠 거예요. 그리고 제가 그랬던 것처럼 11살쯤 되면 학교를 그만두게 할 거예요. 결혼도 외부 사람과는 안 할 거고요. 이게 맞는 길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전통방식에 순응한 언니 로잔과 달리 마가렛은 “어쩔 수 없이 집안일을 하고는 있지만 청소하는 거 재미 없어요. 로잔 언니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싫고 밖에 나가서 친구들하고 놀고 싶어요”라며 불만을 내비쳤습니다.

할아버지 패디 씨는 손녀들이 현대 사회에 맞게 열린 마음을 갖고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폐쇄적인 여행자 사회 특성 상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여행자는 같은 여행자와 결혼해서 전통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있지만 저는 이게 참 슬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출신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우리 조상들이 박해 받았던 아픔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어울려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로잔과 마가렛은 할아버지의 소망처럼 잘 교육받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엔 아직도 많은 ‘집안일’이 아이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