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싫어하면 초딩 입맛? ‘미식가 관문’ vs ‘미식가 코스프레’

동아일보
에디터 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 올여름 냉면 전쟁이 뜨겁습니다. “평양냉면 맛을 모르면 ‘초딩’ 입맛”이라는 평양냉면파의 자신감에 비(非)평양냉면파들은 “입맛에는 귀천이 없다”고 맞섭니다. 평양냉면은 고기 육수에 메밀면을 말아 먹는 물냉면을, 함흥냉면은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면에 매운 양념장을 얹은 비빔냉면을 뜻합니다. 냉면계의 독보적 1인자인 평양냉면을 둘러싼 미식 설전(舌戰)을 취재했습니다. 》
 
망향음식→미식관문→SNS스타
 
올해는 특히 유별났다. ‘평뽕’(평양냉면의 중독성을 빗댄 표현) ‘평부심’(평양냉면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 등 각종 신조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도배한 ‘완냉샷’에 ‘굿즈’(goods·관련 상품)까지. 평양냉면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인스타그램에 수시로 냉면 사진을 올리는 연예인 ‘평양냉면러’를 따라 입문한 뒤 ‘도장깨기’(냉면가게를 차례로 모두 방문)를 다니고 있어요. 면의 메밀 비율과 육수 내용물을 논하다 보면 입맛이 한 차원 높아진 듯 뿌듯합니다.”―박재인 씨(35·디자이너)

“평양냉면을 먹기 전후 그릇 사진을 비교한 완냉샷(냉면을 다 먹었다는 의미)을 SNS에 자주 올리는데, 이걸 따라하는 팬이 많아요. 살고 있는 부산에는 마땅한 평양냉면 가게가 없어 서울로 이사 가야 하나 싶습니다.”―조아련 씨(25·한화 이글스 치어리더)

“SNS에 떠도는 사진은 하나같이 간결한 디자인의 놋그릇에 둥그렇게 말린 면발, 흰색과 녹색 고명이 어우러져 아름답죠. 그런 이미지와 슴슴한 맛이 더해져 ‘유행을 선도하려면 이 정도는 즐겨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김현정 씨(31·회사원)

“1세대 실향민들에게 평양냉면은 ‘망향(望鄕)의 음식’이었고, 1980년대엔 성공한 실향민 2세들을 통해 ‘평양냉면=미식의 관문’이라는 인식이 퍼졌죠. 최근엔 음식 예능 프로그램이 평양냉면을 자주 다루면서 마니아가 많아졌습니다.”―박찬일 씨(52·요리연구가)

“계보를 알아가는 재미도 큽니다. 서울 중구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은 부모가 운영하는 의정부 평양면옥의 두 자매가 독립한 가게인데, 이들 ‘의정부계열’은 밍밍한 육수 위에 고춧가루를 친 냉면을 선보여요. ‘우래옥계열’은 진한 육수가 특징이고 ‘장충동계열’은 의정부와 우래옥의 중간 맛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이용재 씨(42·음식평론가)
 
‘평부심’ 절대 사절
 
일부 마니아의 지나친 평부심과 ‘면스플레인’(면+explain·평양냉면을 가르치려 드는 것)에 불쾌해하는 사람도 많다.

“평양냉면 가게에 데려간 직장 상사들이 가위로 면을 자르면 메밀의 기가 빠져나간다는 둥 일장 연설을 하더라고요. 학원에서 배운 것처럼 평부심 레퍼토리가 똑같았죠.”―강아름 씨(35·직장인)


“평양냉면의 첫인상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맛’이었어요. 한마디로 맛이 없었죠. 가게 사장님은 적어도 다섯 번은 먹어야 맛을 알 수 있다는데, 왜 다섯 번이나 맛없게 먹어야 하나요?”―조아원 씨(21·학생)

“40년 단골 가게에서 최근 젊은 사람들이 메밀향 어쩌고 하는 광경을 종종 봐요.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가 묵은 메밀을 쓰기 때문에 향이 나지 않아요. 또 쇠젓가락이나 가위를 쓰면 안 된다고 하던데, 면 압출기 자체가 금속이거든요.”―김모 씨(60대 후반·전직 군인)

“평양냉면러들을 보면 아는 척 현대미술론을 펼치는 이들의 모습이 겹쳐요. 알쏭달쏭한 대상을 굳이 해석하려 드는 거죠. 그런 억지스러움이 우습게 느껴집니다.”―이호정 씨(33·회사원)
 
사진=MBC 다큐스페셜 ‘냉면’ 방송화면
어려운 음식
 
이런 지나친 평부심 논쟁에 대해 대를 이어 평양냉면을 해온 주인들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평양냉면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사골이 아닌 살코기를 오랜 시간 우려낸 우리 육수는 최고예요. 한 번 맛보면 발길을 끊지 못하죠. 한때 2000그릇 이상 팔린 이유가 있습니다. 정통 평양식으로 동치미 국물을 쓰다가 동치미가 너무 금방 상해서 고기 육수를 쓰기 시작했어요.”―김모 씨(70대·우래옥 관계자)

“육수의 수십 가지 재료를 계절별로 파악해야 하고 메밀면도 그날그날 습도에 따라 반죽을 달리해야 하고 좋은 소를 구하러 전국을 돌아다니고…. 평양냉면은 단순하지만 수십 년 공부해도 어려운 음식이에요. 집에서는 잘 해먹기 힘든 음식인데 자부심을 가질 만하죠.”―김영길 씨(55·마포 을밀대 사장)

“차갑게 식힌 진한 고기 육수는 감칠맛이 뛰어납니다. 게다가 언제고 먹을 수 있는 배달음식이 아니라 중독성이 폭발하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설레는 기분으로 30분 넘게 줄 서 기다리는 음식이 냉면 말고 또 있을까요?”-임만출 씨(43·‘평가옥’ 광화문점 지배인)

‌나도 있다, 함흥냉면

 
평양냉면의 라이벌은 함흥냉면이다.

“평양냉면은 조미료를 넣지 않은 ‘웰빙’ 음식이라고 알려졌지만 대다수 가게가 조금씩 쓰고 있어요. 둘 다 조미료가 들어갔다면 매콤달콤 맛있는 음식을 먹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김정현 씨(51·포목점 운영)

“양념을 육수에 풀어 먹기 때문에 함흥냉면도 그리 자극적이지 않아요. 유행은 돌고 도는 건데, 언젠가 함흥냉면 시대가 올 거예요. 특히 매운맛은 실패가 없거든요.”―김태경 씨(52·식육(食肉)마케터)

각각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의 원조로 꼽히는 서울 중구 ‘오장동 흥남집’과 ‘우래옥’은 서로를 어떻게 평가할까.

“평양냉면은 그냥 시원한 맛이죠. 땀 뻘뻘 흘리고 난 뒤 얼음물 마시듯 후루룩 하면 땀이 쏙 들어가는 맛! 함흥냉면이야말로 중독성이 강해요. 한 번 드셔 보면 알싸한 양념장과 회의 쫀쫀한 식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 겁니다.”―권이학 씨(59·오장동 흥남집 이사)

“옛날엔 가게에 와서 ‘냉면 달라’고 하면 그건 곧 ‘평양냉면’을 뜻했어요. 냉면은 자고로 면인데, 씹히지 않는 질긴 면이 뭐가 맛있나요?(웃음)”―김지억 씨(84·우래옥 전무)
 
냉면의 진화는 무죄
 
냉면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오랜 세월 한반도에서 사랑받아 왔다. 9세기 중엽의 ‘동국세시기’는 ‘싱거운 무김칫국에 국수를 말아 먹는다’고 했고, 19세기 말 ‘시의전서’에는 ‘나박김치나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다’란 내용이 나온다. 구한 말 고종과 순종, 백범 김구 등이 냉면광(狂)이었다. 진주의 진주냉면, 부산의 밀면 등도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 한량들이 권번에서 술을 마신 뒤 입가심하던 음식이 진주냉면으로 발전했습니다. 냉면집이 몰려 있던 진주시장에 불이 난 뒤로 정통 가게의 맥이 거의 끊겼습니다.”―예종석 씨(64·한양대 경영학과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증조할머니께서 고향인 함경도 흥남에서 ‘동춘면옥’을 운영하셨는데 부산에 피란을 내려오셨어요. 메밀 대신 배급받은 밀가루로 냉면을 만들어 파신 게 밀면으로 발전했습니다. 남쪽 사람들은 면이 부드러워졌다며 반응이 좋았다고 해요.”―유재우 씨(41·부산 내호냉면 사장)

대중화 바람을 타고 최근 신흥 평양냉면 가게가 여럿 등장했다. 2세대 아우들은 1세대 형님들과 다른 당돌한 매력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5년 전만 해도 의정부계열이나 장충동계열 가게들이 전부였는데 최근 냉면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저변이 넓어지는 건 좋은데 어설픈 시도로 전통 있는 가게의 명예까지 먹칠하지 않았으면 합니다.”―임모 씨(48·요식업계 종사자)

“냉면 가게가 많아지더니 올해 손님이 확 줄었어요. 간혹 단골손님들이 냉면 맛이 변했다고 하시는데 조리법대로 만들거든요. 세월이 흐르면서 미각이 바뀐 탓 아닐까요?(웃음).”―윤민정 씨(51·을밀대 마포본점 지배인)

“정통 냉면 명가에서 일하던 분들이 독립해서 가게를 차려도 절대 기존 냉면 맛이 안 나요. 재료 구매처와 반죽 등이 미세한 차이를 낳는 거겠죠.”―장수경 씨(68·전 금융인)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