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출산제 도입하면 ‘베이비박스’ 사라질까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6-14 09: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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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교회의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이는 2009년 이후 지금까지 1592명에 이른다. 이종락 목사는 “출생통보제와 비밀출산제가 도입돼 하루 빨리 베이비박스가 무용지물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아기를 유기하지 말고 아래 손잡이를 열고 놓아주세요.’

6월 7일 찾은 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교회 담벼락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밑에는 가로세로 약 1m 크기의 손잡이가 달린 문이 있었다. 2009년 12월 국내에 처음 생긴 ‘베이비박스’다.



이날 교회 안 영아 임시보호소에서는 지난 5월 태어난 아이 3명이 곤히 자고 있었다. 베이비박스가 없었다면 길에 유기될 수도 있었던 아이들이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기면 24시간 상주하는 교회 직원들이 즉시 아이를 보호하면서 아이를 두고 간 부모를 만나 직접 양육하도록 최대한 설득한다. 그럼에도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없으면 보육원이나 다른 가정으로 입양을 보낸다.

정부는 지난 5월 23일 산모가 익명으로 아이를 낳고 아이의 출생 등록을 할 수 있는 ‘비밀출산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베이비박스가 사라지도록 국가가 ‘위기의 산모와 아이’를 직접 지원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일각에선 비밀출산제가 아이 양육을 포기하도록 조장하거나 부모가 누군지를 알아야 하는 아이의 알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밀출산제는 아이를 분만한 병원에서 모든 아동의 출생 사실을 지방자치단체에 알리는 ‘출생통보제’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조치다. 출생통보제를 도입하면 출산 사실을 숨기고 싶은 산모는 병원 이용을 꺼려 출산 위험이 커지고, 태어난 아이를 베이비박스로 보내거나 유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비밀출산제를 함께 도입하면 익명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산모가 양육을 포기하면 바로 지자체 등이 개입할 수 있다.


실제 상당수 선진국에선 출생통보제와 비밀출산제를 함께 시행하면서 베이비박스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 목사는 지난해(2018년) 2월 비밀출산제를 도입하고 정부가 위기 산모를 위한 상담소와 긴급영아보호소 등을 설치하는 내용의 ‘임산부 지원 확대와 비밀출산에 관한 특별법’안 발의를 주도했다. 이 법안은 바른미래당 오신환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태다.

하지만 일각에선 비밀출산제 도입에 앞서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비밀출산제를 허용하면 오히려 정부를 믿고 아이 양육을 쉽게 포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 익명으로 자녀를 출산한 만큼 자녀가 성장한 뒤에도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점도 논란거리다.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 권리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명시된 아동의 기본적인 권리 중 하나다.

현재 비밀출산제를 시행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선 지금도 아동의 친부모 알 권리를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에선 산모가 동의해야만 자녀가 친모가 누군지 알 수 있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에서는 프랑스의 비밀출산제가 자녀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지적한다. 반면 2014년 비밀출산제를 합법화한 독일은 산모가 가명으로 출생 등록을 했더라도 자녀가 16세가 되면 친모의 신상정보를 열람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송효진 연구위원은 “산모의 익명성과 부모가 누구인지 알 자녀의 권리는 모두 존중받아야 할 매우 중요한 가치”라며 “두 가지가 조화될 수 있게 해외 사례를 충분히 검토한 뒤 국내에 비밀출산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근본적으로 위기에 처한 산모들이 아이 양육을 포기하지 않도록 제도적 지원과 함께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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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통보제

아이의 출생 사실을 부모가 신고하는 게 아니라 분만 병원이 지방자치단체에 통보하는 제도. 미국 독일 영국 호주 등 대다수 선진국에서 시행.


비밀출산제


출산 사실을 숨기고 싶은 임신부가 출생통보제 시행으로 병원 이용을 기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엄격한 요건을 거쳐 익명으로 아이를 출산하고 출생 등록을 하는 제도.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