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는 52시간제… 버스기사가 죄지었나” 뒷짐진 정부에 분통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5-09 10: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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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경기 용인의 한 버스업체에서 운전사들이 파업 찬반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이날 부산 대구 울산 등의 버스업체에서도 파업 찬반투표가 진행됐다. 9일엔 서울 버스업체 노조들도 투표를 한다. 용인=뉴스1
“첫차 운행을 맡으면 오전 5시에 나와 오후 10시까지 17시간을 일해요. 그렇게 한 달 벌면 꼬박 270만 원 남짓인데, 월급이 더 줄어들면 생활 못 하죠.”

5월 8일 찾은 경기 남부의 버스업체 A사 차고지. 3년 차 버스 운전사 나모 씨(54)는 급여 명세가 나온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주며 한숨을 쉬었다. 당장 7월 주 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되면 이틀 치 급여만큼 월급이 줄게 된다. 노조가 회사와 협상을 하고 있지만 월급을 보전해 줄지 미지수다.





○ 7월부터 버스 운전사 월급 월 52만 원 감소




5월 8일 부산과 울산 등의 노선버스 운전사들이 ‘15일 총파업’에 대거 찬성표를 던진 것은 임금 감소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나 씨의 급여 명세서를 보면 연장 및 야간수당(162만8250원)이 기본급(86만8400원)보다 75만 원가량 많다. 현재 나 씨는 하루 17시간을 꼬박 일한 뒤 다음 날 쉬는 격일 근무를 하고 있다. 기본급은 8시간에 준해 받고, 나머지 9시간은 기본급보다 많은 연장 및 야간수당을 받는 구조다.



주 52시간제를 시행할 경우 근무 형태가 1일 2교대로 바뀐다. 이렇게 되면 나 씨의 한 달 근무일수는 52시간제 이전 평균 13일에서 22일로 늘어난다. 문제는 기본급이 올라가는 대신 기본급보다 많이 받는 연장 및 야간수당이 대폭 줄어든다는 점이다. 나 씨의 경우 주 52시간제 시행 시 현재보다 월 52만 원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나 씨는 “당장 보험료와 적금 등 고정 지출부터 줄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동료 최모 씨(54)는 “갑자기 52시간제로 월급을 덜 받아가라니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위기감 탓에 A사에서만 지난해 7월 이후 70명이 넘는 운전사가 이직을 택했다. 보수 사정이 나은 서울이나 공항버스 사업장으로 옮긴 것이다. A사 노조 관계자는 “현재 운행 수준을 유지하면서 주 52시간제를 도입하려면 운전사 165명이 더 필요한데, 오히려 장기근속자들이 대거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버스 운전사가 부족해지면서 곳곳에서 버스 노선이 폐지되고 있다. 적자 노선을 없애 확보한 인력을 다른 노선에 투입하기 위해서다. 경기 수원과 화성을 오가는 990번 버스는 5월 13일부터 운행을 잠정 중단할 예정이다. 인천 송도에서 서울 여의도와 잠실을 오가는 M6635, M6336 버스도 지난달 16일부터 운행을 멈췄다. 수원의 B업체 노조 관계자는 “인력을 채우려고 초보 운전사를 뽑다 보니 3년 미만 경력자가 전체 운전사의 83%에 이른다”며 “안전사고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핑퐁 게임’



노선버스 파업 위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지자체에 요금 인상을 권고하고 있다. 요금을 올려 버스 운전사의 임금 손실을 보전해 주라는 취지다. 하지만 지자체는 시민 눈치를 보느라 요금 인상에 소극적이다.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의 버스 요금은 2015년 인상 이후 4년째 동결 상태다. 경기도 관계자는 “서울, 인천이 동조하지 않는 한 우리만 자체적으로 요금을 올릴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도 “(요금 인상은)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서울은 이미 준공영제를 적용해 주 47.5시간 근무를 실시하고 있는 만큼 실제 파업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 52시간제 시행 시 가장 타격을 받는 곳은 경기도다. 국토부에 따르면 주 52시간제를 적용하려면 전국적으로 버스 운전사 4000명이 더 필요하다. 이 중 경기도에 필요한 버스 운전사만 3800명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주요 대도시는 버스 준공영제를 도입하고 있지만 경기도는 광역버스만 준공영제를 실시해 시내버스 인력 충원 문제가 시급하다”며 “지자체의 보조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요금을 인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급한 대로 7월 이전까지 433억 원의 재정지원금과 103억5000만 원의 고용장려지원금을 신설해 버스업계를 지원하기로 했다. 다만 단기간 인력 충원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운행 감축이 이뤄질 122개 노선, 230대에 대해 대체 교통수단을 7월까지 투입할 계획이다.

박은서 clue@donga.com·주애진 / 수원=이경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