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 “삶도 골프도 첫 티샷 중요… 인생후반 9홀 맨발투혼으로 굿샷”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4-26 09: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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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선수가 “같이 셀카 좀 찍어주세요”라고 하자 반갑게 휴대전화 앞에 섰다. “너무 멋졌다”며 엄지를 세운 한 여성 골퍼에게는 “감사합니다”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향한 뜨거워진 주위 반응에 그는 “내가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것도 아닌데”라면서도 밝은 표정을 지었다. 제41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챔피언십 개막을 하루 앞둔 24일 경기 양주 레이크우드CC에서 만난 한국 골프의 전설 박세리(42)다.》 

박세리가 최근 세계 여자 골프의 전설들과 마스터스가 열리는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내셔널골프클럽에서 시타자로 나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번 시타와 타이거 우즈의 마스터스 우승이 자신에게도 큰 힘이 됐다고 했다. 24일 경기 양주 레이크우드CC에서 코스 답사를 하다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박세리. 양주=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대회 해설을 맡은 그는 이날 18홀을 돌며 그린 스피드와 경사 등을 파악하며 코스 답사에 나섰다. 마침 연습라운드를 하던 후배 선수, 골프 관계자들과 수시로 인사를 나누느라 당초 예정된 2시간을 훌쩍 넘긴 3시간 만에야 클럽하우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관심은 박세리가 최근 메이저대회인 ‘명인 열전’ 마스터스가 열리는 미국 오거스타내셔널골프클럽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기 때문. 당시 박세리는 마스터스 개막 직전 이 코스에서 개최된 여자아마추어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에서 역사적인 시타에 나섰다. 마스터스에서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4)가 극적인 부활 드라마를 썼다. 박세리도 누구보다 진한 감동을 받았다.



○ 잊고 있던 존재감이 살아나다

2016년 선수 생활을 끝낸 박세리는 “은퇴 후 내 존재감을 잊고 살았다. 그 후 장래가 불안한 사회 초년병 신세가 된 것 같았다. 이번 시타가 새로운 전기가 됐고 자신감도 생겼다”고 말했다.

1933년 개장한 오거스타내셔널골프클럽은 ‘금녀(禁女)의 공간’이었다. 2012년에야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 등 두 명의 여성 회원이 처음으로 차별의 벽을 허물었다. 그런 사연이 있는 무대에서 사상 첫 여자 골프대회를 개최한 주최 측은 박세리를 비롯해 낸시 로페즈(62·미국), 안니카 소렌스탐(49·스웨덴), 로레나 오초아(38·멕시코)를 초청해 시타를 맡겼다.


“지난해 10월 이후 한 번도 골프채를 잡지 않았어요. 빌린 채로 시타 직전 연습장에서 샌드웨지, 피칭웨지 순서로 몸을 푼 뒤 드라이버를 쳤는데 공이 잘 안 뜨더라고요. 승부근성이 발동돼 집중하니 5번 만에 좀 맞았어요. 시타 때 맨 먼저 치게 돼 더 부담됐는데 공이 진짜 똑바로 멀리 날아가 놀랐어요. 오초아가 ‘복귀해도 되겠네. 1번홀이라도 다 치면 어때’라고 하더군요.”



오거스타내셔널골프클럽에서 시타하고 있는 박세리. 동아일보 DB
꽤 시간이 흘렀어도 시타 장면을 떠올리는 박세리는 그 현장으로 되돌아간 듯 들떠 있었다.

그도 골퍼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한다는 ‘천국의 코스’ 오거스타내셔널골프클럽에서의 라운드 경험은 없다. 박세리는 “이 사실을 접한 골프장 관계자가 놀라며 언제든 연락만 하라고 하더라. 같이 좀 가자는 지인들이 줄을 서게 됐다”며 자랑했다.

박세리는 “시타 참가자 가운데 내가 있다는 게 영광이었을 뿐 아니라 커리어를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했다. 2만2000명 넘는 갤러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티박스에 올라서는데 예전에 우승을 다툴 때처럼 짜릿했다”며 소감을 전했다.


시타자 네 명의 투어 통산 승수는 155승. 상금을 합치면 약 6398만 달러(약 740억 원)에 이른다. 박세리와 소렌스탐, 카리 웹(호주)은 함께 세계 여자 골프 빅3를 형성해 경쟁을 펼쳤다. 그에게 로페즈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고 털어놓았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초창기 영어도 못하고, 친구도 없어 힘들 때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로페즈가 그러더군요. 늘 ‘예스’가 아니라 너를 위해 ‘노’라고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골프에만 매달리지 말고 꽃도, 산도 보며 즐기라고 했죠.”

박세리와 함께 코스를 답사한 김재열 해설위원은 “주최 측은 시타자로 아시아, 미국, 유럽, 중남미를 대표하는 인물을 선정했다. 한국 골프가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 우즈는 내게도 좋은 스승

2004년 제주에서 열린 이벤트 대회에 참가해 수많은 갤러리 앞에서 나란히 빈 스윙을 하고 있는 박세리와 타이거 우즈. 동아일보DB
시타를 마친 박세리는 마스터스 관람 기회를 포기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이동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주니어골프대회를 개최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즈의 우승 장면은 TV로 지켜봤다. “골프 인생이 끝난 줄 알았던 우즈가 포효하는 모습을 보고 코끝이 찡했어요. 시련을 극복한 과정이 골프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희망을 준 것 같아요.”


박세리는 2000년 전후로 우즈와 같이 세계적인 골프 교습가 부치 하먼 밑에서 개별 레슨을 받았다. “레슨 받으며 같이 밥도 먹고 했어요. 우즈는 연습할 때도 어떤 이미지를 그려가며 치더군요. 같은 클럽으로 낮게 치고, 높게 치고, 왼쪽 오른쪽으로 휘어가며…. 우린 공 500개, 1000개 쳤다 뭐 그러잖아요. 우즈를 보며 훈련량이 중요한 게 아니라 퀄리티를 따져야 한다는 걸 느꼈어요. 좋은 스승이었죠.”

10년 넘게 무관이었던 우즈는 긴 터널 속에서 성격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는 평가를 들었다. 박세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성기 때인 2004년 우즈가 제주에 와서 최경주 프로님 등과 함께 이벤트 대회를 했어요. 강한 카리스마로 쉽게 다가갈 수 없었어요. 하지만 고난을 겪으며 우즈도 변했어요. 가족, 팬들의 소중함을 느낀 거 같아요. 물론 재기는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고요.”

코스 답사 도중 행여 큰 대회를 앞둔 후배들에게 방해될까 조심하고, “굿샷”이라고 자주 외쳐주는 박세리의 모습도 과거와는 달라 보였다.

이날 박세리와 마주한 레이크우드CC는 과거 로열CC로 불렸다. 그 시절인 1978년 국내 최초 여자 프로 테스트가 열려 4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올해 KLPGA투어 회원 수는 2530명에 이를 정도로 확대됐다. 박세리는 “우즈 때문에 관뒀던 골프를 다시 시작한다는 분도 있더라. 전체 스포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 같다”고 말했다.



○ 골프 초짜처럼 ‘그립’부터 새로 배운다

2016 리우올림픽 여자골프 대표팀 감독 시절 박세리. 동아일보DB

박세리는 내년 도쿄 올림픽 여자 골프 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여자 골프가 116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부활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박인비의 금메달을 도운 뒤 2회 연속 중책을 맡았다. 당시 ‘4년 뒤 감독 제안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금메달을 땄으니 내 후임은 참 부담될 것 같다. 기회가 온다면 더 하고 싶다”고 의욕을 보였다. 말이 씨가 됐다. 그래도 기대감을 드러냈다. “리우 때는 거리가 너무 멀고 지카 바이러스가 도는 등 어려움이 많았죠. 도쿄는 가깝고 안전할 듯해요. 현지 코스 답사 등 사전 준비에 집중할 생각이에요. 우리 선수들이 부상 없이 최상의 컨디션만 유지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요.”

은퇴 후 그는 골프장 설계 사업을 추진해 필리핀 기업과 계약을 앞두고 있다. 자선 골프 재단도 출범시킬 계획이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골프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도 있다. 박세리는 “최고 골퍼가 되려고 앞만 보고 달리다 전반 9홀을 마쳤다. 이제 후반 9홀을 치기 위해 골프 초짜처럼 ‘그립’부터 새로 배우고 있다. 인생이나 골프나 첫 티샷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후배들을 향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선수 때 미국 기자들이 넌 취미가 뭐냐고 물었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요. 운동밖에 몰랐던 거죠. 후배들은 골프장 밖에서 재충전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오랫동안 행복한 골프를 할 수 있습니다.”

박세리는 와인 사업에도 뛰어들어 ‘세리 와인’도 출시했다. 해외 와이너리에서 시음하고 수입할 와인도 직접 고른다.

팬들이 아주 궁금해할 질문을 해도 될까라고 했더니 “또 결혼 얘기냐”며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결혼하고 싶으니 소개 좀 해 달라. 와인처럼 숙성될수록 또 다른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면 좋겠다. 진실 되면서 유머 감각도 지니고. 리더십도 있고…. 아, 이러면 못 찾는데”라며 웃었다.

인터뷰 마무리에 우즈가 재등장했다. 1997년 처음 마스터스에서 우승할 때 아버지 품에서 울던 우즈는 이번엔 아들을 안고 기뻐했다. 박세리는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맨발 투혼 끝에 정상에 오른 뒤 아버지와 얼싸안았다. 이 얘기를 꺼내자 박세리가 “아픈 데를 또 건드렸다”며 “언젠가 나도 기쁨을 나눌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인생의 후반 첫 홀 티샷을 날린 듯했다.

양주=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