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 사장 “난 상상력 없는 사람…그래도 괜찮아”

이예리 기자
이예리 기자2019-04-12 15: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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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상상력은 성공한 사람들의 특성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음악을 듣고 그 느낌에 맞는 그림을 그린다거나,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얻은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켜 조각상을 만드는 등 상상력은 창의력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상상력을 아예 갖지 못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각적 상상을 할 수 없는 증상인 ‘아판타지아(Aphantasia)’를 겪는 이들은 전체 인구의 2.5%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으나 눈 앞에 없는 사물은 떠올리지 못 합니다.



예를 들어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보통 사람들은 쉽게 형상을 떠올릴 수 있지만 아판타지아를 겪는 이들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뇌의 전두엽과 두전엽에 관계된 현상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대부분 선천적 문제이지만 사고를 겪은 뒤 상상력을 잃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판타지아를 일으키는 확실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픽사의 대표작 중 하나인 '토이 스토리 2' 포스터.
‘상상하지 못하는 증상’ 아판타지아를 가진 사람들은 생각보다 드물지 않습니다. 세계적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 공동창립자 에드윈 캣멀(Edwin Catmull·74)도 시각적 상상력이 아예 없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는 최근 BBC와의 인터뷰에서 “놀랍게도 전 세계적으로 뛰어난 애니메이터들 중에도 아판타지아 증상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물리학과 전산학을 전공한 캣멀 씨는 “퇴근하고 집에 가서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동그란 공 모양을 상상하려 노력한 적도 있지만 불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숫자나 개념은 떠올릴 수 있지만 시각적 이미지는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상상력 넘치는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는 오스카상을 수상한 정상급 애니메이터 중 한 명인 글렌 키앤(Glen Keane)씨 또한 자신과 같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키앤 씨는 ‘인어공주’ 를 담당한 애니메이터입니다.

시각적 상상은 할 수 없어도 창의력은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캣멀 씨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픽사 스튜디오를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초창기에 한 직원의 실수로 제작 중인 작품의 대부분이 삭제돼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실수한 사람을 찾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백업본이 남아있기도 했고, 책임을 따지는 것보다 앞으로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려면 위대하지 않은 단계들을 거쳐야 한다”
그는 저서 ‘창의성을 지휘하라(Creativity, Inc.)’에서 ‘토이 스토리 2’ 제작 당시 경영자로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제작 도중 계획이 변경되어 6개월 동안 전 직원들이 집에도 제대로 가지 못 하고 일에만 매달려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보통 CEO라면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끝났을 일이지만 캣멀은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들면 안 되겠다’고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직원을 ‘갈아 넣어서’ 작품을 만들고 완성도를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게끔 부추기는 조직문화는 오래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인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나의 일”이라며 창의적인 성과는 천재적 영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반복되는 회의와 수정 등 ‘지루하게’ 노력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예리 기자 celset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