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집 복구보다 어르신 일 먼저” 동네 손발이 된 5060막내들

동아일보
동아일보2019-04-09 1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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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오전 강원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에서 어두훈 통장이 산불 피해를 입은 주민에게 피해 신고 방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자신도 환갑이 넘었지만 어 통장은 마을 어르신들의 손발을 자처하고 있다(위쪽 사진). 이날 강원도 한의사협회 의료봉사단의 한의사 이준석 씨가 강원 고성군 토성면 천진초등학교의 이재민 대피소에서 주민에게 침을 놓고 있다. 속초=김자현 zion37@donga.com / 고성=박상준 기자
“할머니, 보건소 차 오늘도 왔어요!”

4월 8일 오전 11시경 강원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 한 사내가 이 마을 경로당 문을 열어젖히며 이렇게 소리쳤다.



“뭐라고?” 경로당 안에 있던 노인들은 사내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듯 되물었다. 사내는 다시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보건소 차로 가서 진찰 받으시라고요.”


○ 피해 노인들 눈과 귀 자처한 ‘5060 청년들’



장천마을은 나흘 전 고성군에서 시작돼 속초시로까지 번진 산불로 전체 42가구의 절반이 불에 타는 큰 피해를 본 곳이다. 사내는 이 마을 성인 중 최연소인 박인철 씨(50). 노부모를 모시며 농사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박 씨 역시 이번 산불로 집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집을 잃고 경로당에서 지내는 마을 노인들의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다. 대부분 70, 80대 노인들이어서 거동이 어렵고 귀가 어두운 경우가 많다. 박 씨는 “스무 살까지 이 마을에 살다가 30년 외지 생활을 한 뒤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 지난해 귀향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다 내 부모님 같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이 마을의 또 다른 ‘젊은이’인 어두훈 통장(61)은 스쿠터를 타고 마을 곳곳을 누볐다. 이날은 산불 피해 신고 마지막 날. 이재민들은 주민센터에 피해 내용을 정해진 양식에 맞게 신고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어 통장은 노인정과 경로당 주변을 오가며 마을 노인들이 신고를 제대로 했는지 챙겨 물었다.

주민센터의 공지사항을 일일이 전파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어 통장은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아들처럼 나서서 이웃 어른들을 부모처럼 챙긴다”고 했다. 장사동 주민센터 직원들도 마을에 찾아와 노인들에게 피해 신고 절차를 안내하고 서류 작성을 도왔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지역 향우회 등을 중심으로 재건 움직임이 활발하다. 속초 토박이모임인 ‘속초 1279’ 멤버이자 구독자가 5000명이 넘는 블로거 정재훈 씨(55)는 피해 지역의 관광산업이 위축되지 않도록 지역 홍보를 하고 있다. 강릉지역고교동문회연합은 이날 이재민 성금 약 1000만 원을 모아 강릉시에 전달하기로 했다.


○ 교복·교과서 불탄 고3, 주변 도움으로 등교





이재민들을 돕기 위한 의료와 상담 지원도 한창이다. 강원도 한의사협회 의료봉사단은 4월 7일에 이어 이날도 고성군 천진초등학교 대피소를 찾아 노인들에게 침을 놔줬다. 상당수 노인이 급히 대피하는 과정에서 허리와 다리 통증이 심해졌고 두통을 호소하는 이재민도 많다. 한의사협회는 진료 수요가 많아 당초 이틀간 진행하려던 봉사기간을 일주일 연장하기로 했다.

재난심리 상담 전문가인 홍인숙 ‘정다운심리상담연구소’ 소장(56)은 대피소에 머무는 이재민들을 찾아다니며 응급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홍 소장은 “고위험군으로 판단되는 인원을 선별한 뒤 추후 정신건강복지센터와 연계해 장기적인 심리상담을 받게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피해 지역 주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 애쓰는 모습이다. 강릉시 옥계면 노인들은 면사무소에서 진행하는 노인일자리사업에 정상 출근했다. 화재로 집이 모두 타버린 김영자 씨(70·여)는 “아직도 마음은 아프지만 막상 움직이니까 한결 낫다. 힘내서 다시 일해 볼 생각”이라며 웃어 보였다.

이번 화재로 집이 불에 타면서 교복과 교과서도 재로 변한 속초여고 3학년 서모 양(18)은 4월 8일 정상 등교했다. 속초시에서 발 빠르게 교복을 지원했고, 친구들이 책과 참고서 등을 빌려준 덕분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연수원에 임시 거주하는 서 양은 화재 충격에도 새벽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한다. 서 양의 어머니 양경아 씨(51)는 “주변의 관심과 도움으로 딸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속초=김자현 zion37@donga.com / 강릉=한성희 / 고성=박상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