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서 인민반장까지 하던 이영희 씨, ‘일본 라멘집’ 차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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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월 28일 북한이탈주민 이영희 씨가 서울 광진구에 창업한 ‘이야기를 담은 라멘’에서 이 씨가 직접 끓인 라멘을 보여주며 웃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서울 광진구 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근처에서 일본식 라멘을 파는 가게 ‘이야기를 담은 라멘’은 연중무휴다. “누구보다도 더 독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가게 사장 이영희 씨(44·여)의 운영 철학 때문이다. 이 씨는 2010년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지 6년 만에 식당을 창업한 ‘사장님’이 됐다.

북한이탈주민은 저임금으로 고된 일을 할 것이라는 편견에 맞서는 이 씨의 창업 이야기는 2015년 시작됐다. 탈북민 스스로 갖는 ‘우리는 안 돼’라는 편견을 깨나가는 라멘을 팔고 싶다는 게 창업의 이유였다.

북한에서 군복 디자인을 하며 인민반장까지 했던 이 씨의 삶은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국경 지대인 양강도에서 살면서 ‘더 좋은 삶’을 꿈꾸게 돼 북한을 벗어났다. 북에 남겨두고 온 아들을 꼭 한국에 데려오겠다는 각오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부터 간호조무사까지 여러 직종에서 악착같이 일했다. 종종 ‘탈북민’ 꼬리표에 알게 모르게 고용주나 동료들에게 무시를 당할 때면 성실함으로 인정받겠다는 마음과 함께 ‘나만의 일’을 갖겠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다졌다.

그러던 이 씨는 2015년 10월, 한국에 정착해 일자리를 찾고 있던 친오빠에게 ‘좋은 프로그램 같은데 한번 봐보라’는 문자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요리도 가르쳐주고 장학금도 나온다는 내용에 급하게 서류를 준비해 모집 마감 날 우체국이 문 닫기 직전 오후 6시에 뛰어가 겨우 접수를 시켰다.

이 씨가 신청했던 프로그램은 서울시 사회투자기금 융자 등을 바탕으로 북한이탈주민의 자립을 돕는 사단법인 PPL의 ‘백사장 프로젝트’ 과정이었다. 시는 사회적 투자를 수행하는 다양한 기업에 낮은 이율로 자금을 융자해주는 사회투자기금을 운용하고 있다. PPL은 올해 상반기 시에서 3억8000만 원을 융자받아 북한이탈주민 식당 창업 교육 사업 등을 수행하고 있다.

이 씨는 2015년 11월부터 2016년 5월까지 7개월간 식당 창업에 필요한 이론과 실전 교육을 받았다. 석 달 동안 주 5회, 하루에 4시간씩 전문요리 학원에서 일식 라멘은 물론 한식·중식·양식 요리까지 배웠다. 이 씨에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손님 응대였다. 이 씨는 “계산대에서처럼 짧은 대화는 괜찮았지만 손님들이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하거나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보는 등 대화가 길어지면 얼굴이 시뻘게졌다”고 회상했다. 손님들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 길어지며 북한 말투가 티 날까 봐 스스로 의식하며 어려워했다고 한다. 이 역시 교육 과정에서 쇼호스트 아카데미에서 파견된 전문 강사에게 말투 교정 등을 받으며 지금은 자신 있게 손님들을 대하게 됐다.

당시 교육생 20여 명 중 우수하게 교육 과정을 이수한 이 씨는 창업 지원자로 선발돼 2016년 12월 29일 ‘이야기를 담은 라멘’ 2호점 사장이 됐다. 이 씨는 PPL로부터 창업 지원금으로 받은 1억5000만 원가량의 융자를 11월이면 다 갚게 된다. 현재까지 8개 매장을 낸 ‘이야기를 담은 라멘’ 중 빚을 다 갚는 첫 번째 가게가 되는 셈이다. 이 씨는 “뒤이어 가게를 낸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PPL에서 진행하는 창업교육을 수료한 북한이탈주민은 2015년부터 현재까지 총 69명으로 이 중 6명이 창업에 성공했고 5명은 올해 안으로 창업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달 5기 교육생 30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서울시 사회적경제과는 “지난해 총 9개 사회적경제기업에 123억여 원을 융자했다”며 “북한이탈주민의 창업이나 탈북 청소년 교육뿐 아니라 돌봄, 주거, 의료 등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필요한 금융을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